대한민국 공휴일(임시공휴일)
2020년 공휴일 총 68일
2020년 월별 공휴일월공휴일월공휴일
1월 | 1일 (수) 신정 25일 (토) 설날 (설 연휴 24일~26일, 27일 대체휴일) |
7월 | 없음 |
2월 | 없음 | 8월 | 15일 (토) 광복절 17일 (월) 임시공휴일 |
3월 | 1일 (일) 삼일절 | 9월 | 30일 (수) 추석연휴 |
4월 | 15일 (수) 국회의원선거 30일 (목) 석가탄신일 |
10월 | 1일 (목) 추석 (추석 연휴 9월30일~10월2일) 3일 (토) 개천절 9일 (금) 한글날 |
5월 | 5일 (화) 어린이날 | 11월 | 없음 |
6월 | 6일 (토) 현충일 | 12월 | 25일 (금) 성탄절 |
1월 1일 신정
양력 1월 1일. 양력설이라고도 한다. 1896년 태양력 수용과 1910년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양력 1월 1일이 '신정'으로 정해졌다. 이후 양력설과 음력설을 이중으로 지키는 혼란이 지속되다가 1989년에야 비로소 음력설이 전통 명절 설날로 회복되었다. 신정은 1월 1일 하루만 공휴일로 정해져 있으며, 지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들이 전국 곳곳에서 열린다.
유래와 변천
예로부터 우리 민족들은 음력 정월 초하루를 한 해의 시작으로 여기고 새해 최초의 명절 설날로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말 음력 1895년 11월 17일(고종 32)부터 태양력을 수용하고 1910년 일제강점기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실시되면서 조선 고유의 세시풍속은 억압받기 시작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쇠는 음력설 설날을 오래되어 없애야 한다는 의미로 '구정(舊正)'으로 불렀고, 양력 새해의 첫 날을 '신정(新正)'으로 칭하여 지키도록 강요했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음력설을 지켰고, 1948년 정부 수립 후에도 음력설과 양력설을 이중으로 지키는 혼란이 지속되었다.
1985년, 음력설이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하루가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1989년에는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음력설을 '설날'로 지정하고 전후 하루씩을 포함한 3일을 공휴일로 정했다. 이후에야 전통 명절 설날은 구정으로 불리면서 덧씌워져 있었던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게 되었다. 신정은 1989년까지 1월 1일부터 1월 3일을 공휴일로 지켰는데, 1990년에는 1월 3일, 1999년에는 1월 2일이 각각 공휴일에서 제외되어 지금은 1월 1일 하루만 공휴일로 정하고 있다.
설날(구정)과의 차이
신정은 명절로써 지켜지는 설날과는 달리, 지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새해 첫날'의 의미가 강하다. 보신각 타종이나 해돋이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행해진다. 반면, 설날에는 온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내며 세배를 하고 차례 음식이나 떡국을 먹는 것이 보편적이다.
음력 1월 1일 설날
원단, 세수, 연수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설이라고 한다. 정초의 차례를 통해 조상에게 인사를 하는 것과 웃어른에게 세배를 하는 것으로 새해 첫날을 맞이한다. 가족들은 덕담을 주고받으며 한해의 운수대통을 축원한다. 덕담은 새해인사로 새해에 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밖에도 설날의 세시풍속은 매우 다양하다. 차례 후 차례상에 놓였던 여러 명절음식들을 나누어 먹는 음복이 마련되며 이웃 및 친인척을 찾아서 세배를 다니는 일도 중요한 풍습이다. 이날 조상의 무덤을 찾아나서는 성묘도 행한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는 인사를 조상의 묘에 고하는 것이다.
이 날은 윷놀이·종정도놀이·널뛰기·연날리기 같은 세시 민속놀이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설이라고 한다. 설은 한자로는 신일(愼日)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근신하여 경거망동을 삼가한다"는 뜻이다. 묵은 1년은 지나가고 설날을 기점으로 새로운 1년이 시작되는데 1년의 운수는 그 첫날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설날의 세시풍속은 매우 다양하다. 설날이 다가오면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자마자 복조리장사들이 복조리를 한 짐 메고 골목을 다니면서 이것을 사라고 외쳐댄다. 각 가정에서는 1년 동안 필요한 수량만큼의 복조리를 사는데, 일찍 살수록 좋으며 집안에 걸어두면 복이 담긴다고 믿는다. 새벽에는 거리에 나가 처음 듣는 소리로 한 해 운수를 점치는 청참(聽讖)을 행하기도 한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미리 마련해둔 새 옷으로 갈아입는데 이 새 옷을 설빔이라 한다. 아침에는 가족 및 친척들이 모여들어 정초의 차례를 지낸다. 차례는 모처럼 자손들이 모두 모여 오붓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차례가 끝나면 어른들께 순서를 따져 세배를 올린다. 떡국으로 마련한 세찬(歲饌)을 먹고 어른들은 세주(歲酒)를 마신다. 세찬이 끝난 후에는 차례상에서 물린 여러 명절음식들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이 마련된다. 아이들에게는 세뱃돈을 주며 덕담을 나누고 한해의 운수대통을 축원해준다. 이웃 및 친인척을 찾아서 세배를 다니는 일도 중요한 풍습이다.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는 부녀자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문안비(問安婢)라 하여 여자종을 성장시켜 일가친척에 보내어 신년문안을 드리게 했다. 정초에 어른이나 친구를 만나게 되면 말로써 새해인사를 교환하는데 이를 덕담이라 한다. "과세 안녕하셨습니까?" 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는 식으로 설날인사를 한다.
벼슬을 하는 집에서는 옻칠을 한 책상을 대청에 비치해둔다. 그러면 밑에 거느린 아전들이 종이를 접어 이름을 써서 책상 위에 놓아두고 간다. 이는 새해 문안드린다는 뜻이며, 각 관청의 서리와 영문(營門)의 교졸(校卒)들도 종이에 이름을 적어 관청이나 선생의 집에 드리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했다. 이날 조상의 무덤을 찾아나서는 성묘도 행한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는 인사를 조상의 묘에 고하는 것이다. 정초에는 여러 가지 제액을 물리치는 속신이 있는데, 삼재(三災)를 물리치는 부적이나 문에 걸어두는 세화(歲畵), 귀신이 신을 신고 가면 불길하다고 신을 감추는 야광귀(夜光鬼) 쫓기, 각 간지마다 금기할 사항과 해야할 일을 정해두는 속신이 있다. 이 날은 윷놀이·종정도놀이·널뛰기·연날리기 같은 세시 민속놀이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3월 1일 삼일절
일제 강점기에 있던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 맞서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펼친 것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된 독립만세 운동은 1919년 5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어요.
3·1운동의 기미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기 전, 만주에서 대한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고, 일본에서는 2·8 독립선언이 발표되었어요.
1919년 3월 1일 정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기 위해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평화적 시위를 열었어요. 이러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1949년 이 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어요.
삼일절이 되면 정부에서 주관하여 기념식을 열고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 돌아가신 애국운동가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하고, 그 뜻을 돌아보는 의식을 해요. 또 각 가정마다 태극기를 내걸고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긴답니다.
5월 5일 어린이날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정한 기념일. 매년 5월 5일이다. 1922년 방정환이 이끄는 천도교 서울지부 소년회에서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이듬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것이 효시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중단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6년 기념일이 다시 거행되면서 5월 5일로 변경되었다.
역사와 법적 근거
‘어린이날’은 1922년 방정환의 지도 아래 천도교 서울지부 소년회를 중심으로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이듬해 조선소년운동협회에서 ‘어린이날’을 제정한 것을 기원으로 한다. 처음에는 5월 1일을 기념일로 했다가 1928년부터 5월 첫째 주 일요일로 변경했다. 1922년 제정 이후, 1925년의 어린이날 기념행사에는 전국의 소년·소녀들이 30만 명이나 참가할 정도로 그 규모가 성장했다.
그 뒤 매년 다양한 행사를 거행했으나, 변경된 어린이날은 1937년까지 유지되다가 일제의 소년단체 해산 명령으로 중단되었다. ‘어린이날’ 행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1946년이다. 이 해 5월 첫째 일요일이 5월 5일이었는데 이때부터 날짜가 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5월 5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1957년 제35회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내무부·법무부·문교부·보건사회부의 4개 부처 장관의 명의로 <어린이 헌장>을 공포해 어린이에 대한 기본사상을 재정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3년 3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어린이날’을 법정기념일로 제정했다. 1975년 1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의해 법정 공휴일로 정했고, 이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서 제외했다. 1981년 4월 <아동복지법>에 의해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했으며, 1982년 5월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재규정했다.
관련 행사
각 지역별 시, 군청 주최로 매년 어린이들이 참가할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 중에 있으며, 초등학교와 유치원 등에서도 부모와 함께 하는 행사를 독려해 어린이날을 기념한다. 비공식적으로는 놀이공원이나 문화센터 등에서 크고 작은 이벤트를 열고 있다.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
개요
석가모니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날. 음력 4월 8일이며 불교의 연중 기념일 가운데 가장 큰 명절이다. 경론에는 2월 8일, 4월 8일의 설이 있으나, 중국·한국에서는 음력 4월 8일로 기념하여왔다
명칭 변천
초파일이라고도 한다. 1975년 대통령령에 의해 석가탄신일로 지정된 이래, 불교계에서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명칭을 '부처님 오신 날'로 바꿔줄 것을 요청해왔다. 이후 2017년 10월 국무회의에서 관공서를 통한 공휴일의 규정에서 기존의 석가탄신일을 부처님 오신 날로 변경하는 내용이 의결되어 지금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관련 행사
이날에 행해지는 연등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 의종 때 백선연(白善淵)이 4월 8일에 점등했던 것이다. 당시 초파일 연등을 1번 밝혀 3일 낮과 밤 동안 등을 켜놓고 미륵보살회를 행했다고 한다. 연등을 만들 때 그 모양은 수박·거북·항아리 모양 등으로 매우 다양했다. 이렇게 만든 등은 등대(燈臺)를 세워 걸어놓거나 연등을 실은 배를 강에 띄워놓았다.
연등놀이는 일반 사람들이 연등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 놀이는 일제강점기에 금지되었다가 8·15해방 후 제등놀이로 부활되었다. 방생은 다른 이가 잡은 물고기·새·짐승 등의 산 것을 사서 산이나 못에 놓아 살려주는 일을 말하고, 물놀이는 아이들이 등대 밑에 자리를 깔고 느티떡과 소금에 볶은 콩을 먹으며 등대에다 물을 담아놓은 다음 바가지를 엎어놓고 이를 두드리며 노는 놀이를 말한다. 이렇듯 많은 놀이가 성행했음은 초파일 행사가 불교신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민속놀이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6월 6일 현충일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국군장병들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정된 법정기념일. 1956년부터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추념식과 참배행사, 각종 추모기념식이 국립현충원에서 거행되며, 기업·단체·가정 등에서는 조기를 게양하기도 한다.
정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6·25 참전용사들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 지정된 국가기념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라, 매년 6월 6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제정 배경
1953년 9월 29일 동작구 동작동에는 6·25전쟁 중 순직한 국군장병들을 안치하기 위한 국군묘지의 설치가 확정되었다. 정부는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관리소를 발족하고, 이듬해 4월에는 <국군묘지설치법>을 제정해, 군묘지의 운영과 관리를 제도화했다. 이 과정 중, 4월 19일에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6월 6일을 '현충기념일'을 공포하게 되었다. 이날은 통상적으로 '현충일'로 불리다가 1975년 12월부터는 공식적으로 '현충일'로 개칭되었으며, 1982년부터는 대통령령, 공휴일로 정하게 되었다.
주요 행사
현충일의 제정 이후 이전의 산발적으로 열리던 추모 행사는 국방부 소관으로 시행되었고, 1988년부터는 개별적으로 실시되었던 추념식과 참배행사 모두를 현충원에서 거행하게 되었다. 각종 추모 기념식과 함께 대통령 이하 정부요인들, 그리고 국민들이 국립현충원에서 참배한다. 이밖에 오전 10시 정각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전국민은 1분간 경건히 묵념을 하며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진 국군장병 및 순국선열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갖는다. 각 관공서를 비롯하여 각 기업, 단체, 가정 등에서 조기를 게양한다.
8월 15일 광복절
광복절은 우리나라가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에서 벗어나 독립한 날과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날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나라 4대 국경일의 하나로, 1949년에 제정되었다. 이날은 독립 기념관에서 기념식을 한다. 또 전국적으로 축하 행사가 열리며, 가정에서는 국기를 단다.
우리나라는 1910년 8월 28일에 일본에 주권을 빼앗겼다. 그러나 선조들은 주권을 다시 찾기 위해 무장 투쟁을 벌이는 등 끊임없이 힘썼다. 우리 선조들은 1919년 3월 1일에는 서울에 있는 탑골 공원에서 기미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일본은 평화적인 만세 운동을 총칼로 진압하였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선조들은 중국의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세우고, 광복군을 조직하는 등 더욱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식민 통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여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곧바로 우리나라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고, 38도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되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여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음력 8월 15일로, 명절의 하나. 추석
개설
가배·가위·한가위 또는 중추절(仲秋節)이라고도 한다. 이 때는 농경민족인 우리 조상들에 있어 봄에서 여름 동안 가꾼 곡식과 과일들이 익어 수확을 거둘 계절이 되었고 1년 중 가장 큰 만월 날을 맞이하였으니 즐겁고 마음이 풍족하였다.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아서 살기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므로 속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추석을 명절로 삼은 것은 이미 삼국시대 초기이었으니,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제3대 유리왕 때 도읍 안의 부녀자를 두 패로 나누어 왕녀가 각기 거느리고 7월 15일부터 8월 한가위 날까지 한 달 동안 두레 삼 삼기를 하였다. 마지막 날에 심사를 해서 진 편이 이긴 편에게 한턱을 내고 <회소곡 會蘇曲>을 부르며 놀았다고 한다.
오랜 전통이 있는 추석명절에는 여러 가지 행사와 놀이가 세시풍속으로 전승되고 있다. 추석이 되면 조석으로 기후가 쌀쌀하여지므로 사람들은 여름옷에서 가을 옷으로 갈아입는다. 추석에 입는 새 옷을 ‘추석빔’이라고 한다. 옛날 머슴을 두고 농사짓는 가정에서는 머슴들까지도 추석 때에는 새로 옷을 한 벌씩 해준다.
추석날 아침 일찍 일어나 첫 번째 일은 차례를 지내는 일이다. 주부에 의해서 수일 전부터 미리 준비한 제물을 차려놓고 차례를 지낸다. 이 때에 설날과는 달리 흰 떡국 대신 햅쌀로 밥을 짓고 햅쌀로 술을 빚고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차례를 지내는 것이 상례이다. 가을 수확을 하면 햇곡식을 조상에게 먼저 천신(薦新)한 다음에 사람이 먹는데 추석 차례가 천신을 겸하게 되는 수도 있다.
차례가 끝나면 차례에 올렸던 음식으로 온 가족이 음복(飮福)을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조상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는데, 추석에 앞서 낫을 갈아 가지고 산소에 가서 풀을 깎는 벌초를 한다.
여름동안 자란 풀이 무성하고 시들어 산불이라도 나면 무덤이 타게 되므로 미리 풀을 베어주는 것이다. 어쩌다 추석이 되어도 벌초를 하지 않은 무덤은 자손이 없어 임자 없는 무덤이거나 자손은 있어도 불효하여 조상의 무덤을 돌보지 않는 경우여서 남의 웃음거리가 된다.
추석은 공휴일로 제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교통혼잡을 이루고 도시의 직장들은 쉬게 된다. 이처럼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조상에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기 위해서이다. 추석명절에 차례와 성묘를 못 하는 것을 수치로 알고, 자손이 된 도리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우리 나라 사람의 의식구조이다.
추석 놀이
추석 무렵은 좋은 계절이고 풍요를 자랑하는 때이기에 마음이 유쾌하고 한가해서 여러 놀이를 한다. 사람들이 모여 농악을 치고 노래와 춤이 어울리게 된다.
농군들이 모여 그 해에 마을에서 농사를 잘 지은 집이나 부잣집을 찾아가면 술과 음식으로 일행을 대접한다. 먹을 것이 풍족하니 인심도 좋아서 기꺼이 대접을 한다. 이렇게 서너 집을 다니고 나면 하루가 간다.
농군들이 마을을 돌면서 놀 때에 소놀이·거북놀이를 하게 된다. 소놀이는 두 사람이 멍석을 쓰고 앞사람은 방망이를 두개 들어 뿔로 삼고, 뒷사람은 새끼줄을 늘어뜨려 꼬리를 삼아 농악대를 앞세우고 이집저집 찾아다닌다. 일행을 맞이하는 집에서는 많은 음식을 차려 대접한다. 마당에서 술상을 벌이고 풍물을 치고 춤을 추면서 한때를 즐긴다.
이때에 소도 춤추는 시늉을 하면 사람들은 웃고 놀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소놀이를 할 때 마을에서 일을 잘하는 머슴을 뽑아 농우에 태워서 마을을 누비고 다니는 일도 있다. 여름 동안 수고가 많았으므로 위로하는 것이고 영광을 안겨주는 일이 된다. 상머슴으로 뽑히면 일을 잘하였기 때문에 다음해에 많은 새경을 받게 된다.
거북놀이는 두 사람이 둥근 멍석을 쓰고 앉아 머리와 꼬리를 만들어 거북이시늉을 하고 느린 걸음으로 움직인다. 사람들이 거북이를 앞세우고 큰 집을 찾아가 “바다에서 거북이가 왔는데 목이 마르다.”면서 음식을 청하고 들어가면 주인은 음식을 내어 일행을 대접한다. 놀이는 소놀이와 비슷하다.
한 집에서 잘 먹고 난 다음 다른 집을 찾아간다. 이때에 얻은 음식을 가난해서 추석음식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있어 협동과 공생(共生)의 의식을 보이기도 한다. 소놀이와 거북놀이는 충청도·경기도 등에 전승되고 있다.
또, 마을사람들은 모여 줄다리기도 하였다. 한 마을에서 편을 가르거나 몇 개 마을이 편을 짜서 하거나 또는 남녀로 편을 갈라서 하는 일도 있다. 줄의 크기나 편의 규모는 일정하지 않고 많을 때에는 수천 명에서 작을 때에는 수십 명이 모여서 하는 수가 있으나 집단을 이루며, 줄의 큰 것은 줄 위에 올라앉으면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큰 경우도 있다.
큰 줄을 만들려면 볏짚이 많이 필요하므로 각 집에서 짚단을 제공하고 수천 단을 들여서 만드는 일도 있다. 만든 줄을 줄다리기 장소로 옮길 때에 너무 커서 들고 가지 못하면 근래에는 트럭에 싣고 가거나 끌고 가는 일도 있다. 줄다리기의 승부는 한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농경의례의 하나로 여겨, 암줄이 이기면 풍년이 드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줄다리기는 상원에 주로 하지만, 추석 때와 단옷날에 하는 곳도 있다.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씨름판을 벌이는데, 어린이들은 아기씨름을 하고 장정들은 어른씨름을 한다. 잔디밭이나 백사장에서 구경꾼에 둘러싸여 힘과 슬기를 겨루게 된다. 씨름에서 마지막 승리한 사람에게는 장사라 부르고 상으로 광목, 쌀 한 가마, 또는 송아지를 준다.
궁사(弓士)들은 활쏘기도 한다. 사정(射亭)에 모여 일정한 거리에 과녁을 만들어놓고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는 경기이다. 활쏘기는 상무정신을 기르게 하고 심신을 단련하게 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마음을 통일시키지 못하면 과녁을 맞출 수가 없기에 호흡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쏘아야 한다. 여러 궁사들이 줄을 서서 차례로 쏘아 과녁에 맞으면 ‘지화자’ 노래를 부르면서 격려하고 축하를 해준다.
전라남도 서남해안지방에서는 부녀자들이 강강술래놀이를 즐긴다. 추석날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달이 솟을 무렵 젊은 부녀자들이 넓은 마당이나 잔디밭에 모여 손과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뛰고 춤춘다.
노래는 처음에 진양조로 느리게 부르다가 차츰 빨라져서 나중에는 마구 뛰게 된다. 노래 장단에 따라 춤동작이 정하여진다. 만월 아래 추석빔으로 곱게 단장한 젊은 여인들의 원무(圓舞)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강강술래놀이는 원무를 하는 외에 여러 놀이가 첨가되어 다양하게 전개되는 수도 있다. 곧, 손을 잡고 일렬로 서서 맨 앞에 있는 사람이 다음 사람의 팔 밑으로 꿰어 가는 고사리꺾기가 있다.
또 일렬로 서서 맨 끝에 있는 사람이 맨 앞에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면서 덕석(멍석)을 말 듯이 몇 번이고 도는 대로 한 덩어리로 뭉치게 되는 덕석몰이, 원을 그리면서 춤추는 중앙에 한 사람 혹은 두세 사람이 뛰어들어가 두 손을 내두르며 뛰고 춤추는 남생이놀이,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마주서서 문을 만들면 다른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문 밑을 빠져나가는 문열기 등 여러 가지 놀이가 행해진다.
놀이방법이 변함에 따라 불려지는 노래의 가사도 달라진다. 이 놀이는 일설에는 이순신(李舜臣)이 창안하였다고 하나, 원시시대에 1년 중에서 가장 밝은 만월을 맞이하여 놀이하던 원무를 이순신이 의병술(擬兵術)로 채택해서 임진왜란 때에 왜군을 격퇴하는 데 썼던 것으로 해석된다.
추석명절에는 옛날의 서당에서는 훈장이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 집으로 가기 때문에 공부를 며칠 쉬게 된다. 모처럼 글공부에서 해방된 학동들은 모여서 놀이를 하는데, 그 중에는 가마싸움과 원놀이가 있다. 학동들이 모여 나무로 가마를 만들어 바퀴를 달고 이웃 마을의 서당과 경기를 한다.
서로 가마를 가지고 넓은 마당에 모여 가마를 끌고 뛰어나와 상대편 가마와 부닥치게 한다. 몇 번을 되풀이하면 가마가 망가지게 되는데, 먼저 망가진 편이 지고 아무리 부닥쳐도 가마가 성하면 이기게 된다. 평상시에 앉아서 글만 읽던 학동들에 있어서는 활달한 놀이였다. 원놀이 역시 훈장이 없는 사이에 학동들에 의해서 행해진다.
글을 잘하고 오래 배웠으며 재치 있는 사람을 뽑아 원님으로 하고, 학동 중에서 소송을 하는 사람과 소송을 당하는 사람으로 나누어 원님이 판관이 되어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놀이니 오늘날의 모의재판과 같은 것이다. 옛날에는 과거에 급제해서 관원이 되면 판관으로서 민원을 처리하고 백성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사리를 따져서 정(正)과 사(邪)를 구분할 줄을 알아야 한다.
판관의 예행연습을 원놀이에서 미리 하였던 것이다. 소송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여 판관이 좀처럼 판결하기 어렵도록 한다. 그러나 가부간에 판관으로서는 판결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지혜를 짜내어 판단을 하여야 하였다.
유식한 문자를 쓰고 고사(故事)를 예로 들고 사실(史實)을 제시하여 누구든 납득할 수 있는 명판결을 해서 후세에 일화를 남긴 민담(民譚)도 전래되고 있다. 원놀이는 서당의 학동으로서는 품위 있고 학술연마도 되며 지혜를 연마하는 알맞은 놀이였다.
남도지방에서는 닭싸움과 소싸움을 즐기는 일도 있었다. 싸움을 잘하는 수탉을 길러서 싸움을 시키는데, 수탉의 힘이 세 지라고 고기를 먹이는 일도 있다. 닭이 싸울 때는 부리로 상대 닭을 찍고 물고 늘어지는데, 볏에 유혈이 낭자한데도 지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한다. 서로 찍으려고 몸을 부닥치고 높이 뛰어서 상대편 볏을 노린다.
닭싸움에 지면 그집 마당에 놀러가지도 못하고 암탉도 빼앗기기 때문에 사투를 한다. 닭싸움을 구경하며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내기를 하는 일도 있다. 소싸움은 넓고 튼튼한 우리를 만들고 황소의 고삐를 풀어 두 마리를 넣어두면 싸움이 시작된다. 서로 노려보다가 앞발로 땅을 긁어 흙을 파헤치면 성낸 표시가 되고, 서로 머리를 대고 비비고 뿔로 받고 밀치고 한다.
뒤로 물러섰다가 부닥치는 소리가 “쿵!” 하고 크게 나서 힘과 힘의 대결임을 알 수가 있어 장관을 이룬다. 힘과 끈기와 투지의 대결로 한없이 밀리거나 뿔로 심하게 받혀서 부상을 하면 도망치는데, 하나가 도망하면 승부가 난다. 소싸움도 좋은 구경거리가 되는 한편 내기를 하는 일도 있다.
농촌의 소년들 사이에는 콩서리를 하는 일도 있다. 콩을 통째로 꺾어다 불을 피운 속에 넣어두었다가 익으면 꺼내어 먹는데 맛이 별미이다. 밭 콩보다는 논두렁 콩이 더 맛이 있어 초가을에 흔히 한다.
제주도에서는 조리희(照里戱)가 있었다고 ≪동국세시기≫에 전한다. 남녀가 모여 노래부르고 춤을 추면서 놀았으며, 패를 짜고 큰 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줄이 중간에 끊어지면 모두 주저앉게 되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고 한다. 한편, 그네를 뛰고 닭잡기 놀이(捕鷄之戱)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민간신앙적 행사
추석 전날 밤에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는 사내아이들이 밭에 가서 벌거벗고 고랑을 기어다니는 풍속이 있다. 밭둑에다 음식을 차려놓고 토지신을 위하는 일도 있는데, 이렇게 하면 밭곡식이 풍년들어 많은 수확을 올릴 뿐 아니라 아이들의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건강하여진다고 믿고 있다. 일종의 농업주술(農業呪術)과 건강을 축원하는 행위이다.
추석 무렵에 올게심니를 하는 풍속이 있다. 그해의 농사에서 가장 잘 익은 곡식으로 벼·수수·조〔粟〕 등의 목을 골라 뽑아다가 묶어서 기둥·방문 위나 벽에 걸어놓는다. 올게심니를 해놓으면 그 곡식들이 다음해에 풍년이 든다고 믿고 있으며, 이 때에 떡을 하고 술도 빚고 닭도 잡아서 소연을 베푸는 수도 있다.
올게심니를 하였던 곡식 목은 무슨 일이 있어도 먹지를 않으며 다음해에 종자로 쓰거나 다음해에 새로 올게심니를 할 때에 찧어서 밥이나 떡을 해서 조상의 사당에 천신하기도 한다. 풍년을 기원하는 주술행위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추원보본(追遠報本)이 합하여진 행위이다.
부엌의 부뚜막에는 조왕(竈王)이 좌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왕은 불을 담당하고 재산을 담당하기도 한다. 속설에 조왕은 섣달 스무 닷샛 날에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에게 1년 동안 집안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그믐날에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한다. 각 가정에서는 조왕을 모시기 위하여 사발에 물을 떠서 밥솥 뒤쪽에 놓아두고 위하는데, 특히 추석날에는 조왕을 위하여 정화수를 갈아준다.
부지런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아낙네는 매일 물을 갈아놓는 일도 있고, 초하루와 보름날 두 번 갈아주는 집도 있다. 추석을 전후해서 햇곡식이 나오면 장독대에 정한 짚을 깔고 떡·미역국·무나물·배추나물·고기·탕을 차려놓고 비는데, 이를 성주모시기라 한다. 방에 차려놓는 일도 있고 또는 장독대에 차려놓고 빈 다음 방으로 옮겨서 다시 빌기도 한다.
성주는 가신(家神) 중에서 어른에 속하고 주인의 명복(命福)과 관계가 있어 소중하게 모신다. 어촌에서는 추석에도 상원 때와 같이 뱃고사를 지낸다. 선주네 집에서 음식을 차리고 집에서 지내는 일도 있고, 배에다 기를 달고 등불을 밝히고 배서낭을 위하는 일도 있으며, 또는 음식을 차려 바다에 나가서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뱃고사를 지내는 이유는 바다에 나가 풍랑을 만나지 말고 만선(滿船)을 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바다생활은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많은 고기를 잡아야 하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어, 무당을 불러 며칠을 두고 큰굿을 하는 일도 있다.
그밖에 추석날의 일기를 보아 여러 가지로 점을 친다. 추석날은 일기가 청명해서 밝아야 좋다. 비가 내리면 흉년이 든다고 해서 불길한 징조로 삼고 있다. 밤에 구름이 끼어 달빛을 볼 수가 없으면 보리와 메밀이 흉년이 들고, 토끼는 포태(胞胎 : 임신)를 못해서 번식을 못하고, 개구리가 새끼를 까지 못한다고 전한다.
추석날 밤에 흰 구름이 많이 떠서 여름에 보리를 베어서 늘어놓은 것처럼 벌어져 있으면 농작물이 풍년이 들지만, 구름덩이가 많거나 구름이 한 점도 없으면 그 해의 보리농사는 흉년이 들 징조라고 해석을 한다. 경상남도지방에서는 8월에 들어 창문을 바르지 않는데, 특히 추석을 전후해서 문을 바르지 않는다.
여름철에는 문이 찢어져 있으면 바람이 들어와서 시원하기 때문에 그냥 두었다가 7월에는 일단 창호지로 문을 바른다. 그러나 8월 달에 들어와서는 찢어진 문구멍을 새로 바르는 것이 금기(禁忌)로 되어 있다. 금기를 어기면 도적을 맞는 일이 생기고 집안에 우환이 들끓게 된다고 전한다. 그래서 찬바람이 들어와도 그냥 두었다가 9월에 들어서야 문을 바른다.
추석 절식
추석에는 시절(時節)에 맞는 여러 음식이 있다.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설날의 음식과 별 차이는 없다. 다만 추수의 계절이라 햇곡식으로 밥·떡·술을 만든다.
철이 이르면 추석 차례에 햇곡식을 쓸 수가 있고, 철이 늦으면 덜 익은 벼를 베어서 찧은 다음 말렸다가 방아를 찧어서 햅쌀을 만들어 쓴다. 철이 늦은 해에는 미리 밭벼〔山稻〕를 심었다가 제미(祭米)로 쓰는 일도 있다.
어떻든 추석 차례에 대비해서 농사를 짓는다. 햅쌀로 밥을 지으면 맛이 새롭고 기름기가 있으며 떡도 맛이 있다. 추석 떡으로는 송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올벼로 만든 송편이라 해서 올벼송편이라는 말이 생겼다. 송편 속에도 콩·팥·밤·대추 등을 넣는데, 모두 햇것으로 한다. 모두 햇곡식이기 때문에 더욱 맛이 있다.
열 나흗날 저녁 밝은 달을 보면서 가족들이 모여 송편을 만든다.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예쁜 배우자를 만나게 되고, 잘못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해서 처녀·총각들은 예쁘게 만들려고 솜씨를 보인다.
또, 태 중인 부인이 태아가 아들인지 딸인지 궁금할 때에는 송편 속에 바늘이나 솔잎을 가로 넣고 찐 다음 한 쪽을 깨물어서 바늘의 귀 쪽이나 솔잎의 붙은 곳을 깨물면 딸을 낳고 바늘의 뾰족한 곳이나 솔잎의 끝 쪽을 깨물면 아들을 낳을 징조라고 점을 치는 일도 있다.
제사를 지내려면 술이 꼭 있어야 하는데, 추석 술은 백주(白酒)라고 하여 햅쌀로 빚기 때문에 신도주(新稻酒)라 이름하였다. 술을 많이 준비하여야만 이웃 사이에 서로 청하여 나누어 마시고, 소놀이패·거북놀이패들이 찾아왔을 때 일행을 후하게 대접할 수가 있다. 남성의 접빈객(接賓客)은 첫째가 술인 만큼 술을 넉넉히 마련한다. 우리네 잔치에는 술만 풍족하면 되었다.
혼인·환갑·장례·명절 때에는 손님 중에 술에 취해서 몇 사람쯤 쓰러져 있으면 그 집 잔치 잘하였다고 할만큼 술은 손님대접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된다. 추석 때면 풍년도 짐작되기 때문에 인심이 후해서 술대접을 서로 하게 된다. 추석에는 황계(黃鷄)를 빼놓을 수가 없다. 봄에 깬 병아리를 기르면 추석 때에는 성숙해서 잡아먹기에 알맞다.
명절에 맞추어 길렀다가 추석에 잡아서 쓰게 된다. 또 옛날에는 명절에 어른에게 선사하는 데 닭을 많이 썼다. 친정에 근친(覲親)하는 딸이 닭이나 달걀꾸러미를 가지고 갔으며, 경사가 있을 때에도 닭을 선사하였으며,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손쉬운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사위가 오면 장모가 씨암탉을 잡아 대접하는 것이 그 예이다. 추석에 백주와 황계는 좋은 술과 안주였다.
가을 과일로는 감·밤·대추·호두·은행·모과 등이 전래의 것이고, 요즈음에는 사과와 배가 첨가되었다. 밤·대추·곶감은 제물(祭物)로 필수이어서 가을에 알밤을 말려 두었다가 쓴다. 추석 때의 풋밤은 제상에도 오르거니와 밥과 송편에도 넣고 단자(團子)를 만들기도 한다.
대추는 단맛이 있어 여러모로 쓰였고 약식에도 넣었으며 약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호두·은행은 값이 비싸므로 두었다가 상원날 부럼에 쓰기도 한다. 모과는 약으로 쓰거나 차(茶)로 쓰이고, 술로 담그기도 한다.
녹두나물과 토란국도 미각을 돋우는 절식(節食)의 일종이다. 녹두나물은 소양(消陽 양을 쇠하게 함.)한다고 하지만 잔칫상에 잘 오르고, 토란은 몸을 보 한다고 해서 즐긴다.
추석 때면 농가도 잠시 한가하고 인심도 풍부한 때이므로 며느리에게 말미를 주어 친정에 근친을 가게 한다. 떡을 하고 술병을 들고 닭이나 달걀꾸러미를 들고 친정에 근친을 가서 혈육과 회포를 푸는 기회를 가진다. 근친을 갈 수가 없는 경우에는 반보기를 한다.
이는 친정과 미리 통문을 해서 친정과 시집 중간의 경치 좋은 곳을 정하여, 딸은 친정어머니가 즐기는 음식을 마련하고 친정어머니는 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마련해서 서로 만나는 것이다.
이것을 중로회견(中路會見) 또는 중로보기·반보기라고 한다. 전라남도 강진지방에서는 한 마을의 부녀자들이 집단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경치 좋은 곳에 가서 하루를 놀고 즐기는 것을 반보기라 부르기도 한다.
추석 무렵의 생산력(生産曆)을 작업별로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농업 : 벼 베기, 콩·팥·수수·고구마 거두어들이기, 퇴비하기, 무·배추 갈기, 밭 골타기, 목화·담배잎·고추 따기, 밀·메밀·양파·시금치 파종하기, 거름내기, 누에치기, 논둑 고치기, 겨울나무 준비하기, 담장 수리하기, 병아리 깨기, 길쌈하기, 과일 저장하기, 곶감 말리기, 약초 캐기, ② 어업 : 오징어·갈치·다랑어 잡기, ③ 임업 : 잔디씨 받기, 낙엽송씨앗대기 등이 있다.
추석은 1년 중 가장 큰 만월을 맞이하는 달의 명절로서, 농경민족으로서 수확의 계절을 맞이하여 풍년을 축하·감사하며 조상에게 천신하고 성묘하여 추원보본을 하였고, 명절의 기쁨에 넘쳐 여러 가지 놀이가 있어 사람의 마음을 더욱 즐겁게 하였으며, 신을 섬기고 풍·흉을 점복(占卜 : 점침.)하였다. 풍부한 음식을 서로 교환해서 후한 인심을 보였고, 농한기를 이용해서 놀이하고 근친(近親:친정에 가서 아버지를 뵘)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추석은 농경생활에서 추수감사와 조상에 보은하며 먹을 것이 넉넉함에 만족하여 온갖 놀이로 즐기는 명절로 전승되었으나 공업생산시대에 들어와 그 절실함이 감소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추석 귀성은 여전하며, 풍요에 감사하고 조상에 추원보본하는 추석의 원래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0월 3일 개천절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국경일. 대종교의 절기에서 비롯되었으며,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민족의 기념일로 채택되어 음력 10월 3일을 기념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연호로 단기를 채택했으며, 이듬해 제정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서 국경일로 공식 제정하여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지금의 개천절은 양력 10월 3일이나, 여러 단군숭봉단체는 전통에 따라 음력 10월 3일에 의식을 행하고 있다.
정의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개천이란 본디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각주1) 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을 기념하되,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2333년 10월 3일을 정해 개천절이라고 명명했다.
역사
개천 및 개국의 연대를 역사적 사실로 믿는 이들은 실제 개천은 단군의 개국보다 124년 앞선 상원갑자년 10월 3일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신화적 연대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개천절이 경축일로 제정된 것은 1909년 중창된 나철의 대종교에 의해서이다. 이는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음력으로 10월 3일을 민족의 기념일로 제정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단군 연호를 채택하여 단기를 국가의 공식 연호로 제정했으며, 1949년 10월 1일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했다.
개천절이 음력 10월 3일로서 우리의 고유한 제천행사의 시기와 일치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즉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음력 10월을 상달이라고 부르며 1년 농사를 마감하고 수확한 곡식으로 감사하는 제천의식을 거행해왔다. 이는 고구려의 동맹·부여의 영고·예맥의 무천 등으로 확인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후 고려나 조선시대에서도 국난 때마다 단군신앙이 부활되고 사당이 건립되었으며, 여러 지역의 민속에서는 지금까지도 해마다 10월에 제천의 형식을 띤 동제를 거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개천절을 10월로 정한 기본적 근거가 되었다. 지금의 개천절은 양력 10월 3일로 되어 있으나, 여러 단군숭봉단체는 전통에 따라 음력 10월 3일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다.
개천절 노래
1절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2절
백두산 높은 터에 부자요 부부
성인의 자취 따라 하늘이 텄다
이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이날이 시월 상달에 초사흘이니
3절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
다시 필 단목 잎에 삼천리 곱다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잘 받아 빛내오리다 맹세하노니
정인보 작사, 김성태 작곡
10월 9일 한글날
1926년 11월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를 주축으로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해 행사를 거행했고 1928년에 '한글날'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2, 1933년에는 양력 10월 29일에 행사를 치렀으며, 1934~45년에는 10월 28일에 행사를 치렀다.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의 말문에 적힌 날짜에 근거하여 1945년부터 한글날을 10월 9일로 확정했다. 이 날에는 세종문화상을 시상하고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을 참배하며 전국에서 학술대회 및 각종 백일장을 거행한다. 2005년에 국경일로 승격되었으며, 2012년 12월에는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개요
한국의 국경일. 매년 10월 9일이다. 한국의 문화유산인 한글을 제정 반포한 세종대왕의 위업을 선양하고,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을 널리 알려 문화민족으로서 국민의 자긍심을 일깨우려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이 날에는 세종문화상을 시상하고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을 참배하며 전국에서 학술대회 및 각종 백일장을 거행한다.
기원
한국 고유의 문자 체계인 한글을 기념하는 날을 제정하려는 노력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에 시작되었다. 1926년 11월 4일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가 주축이 되어 매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행사를 거행했고 1928년에 명칭을 '한글날'로 바꾸었다. 1932, 1933년에는 음력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여 양력 10월 29일에 행사를 치렀으며, 1934~45년에는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8일에 행사를 치렀다. 지금의 한글날은 1940년 〈훈민정음〉에 발견된 해례본 말문에 적힌 "正統十一年九月上澣"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보면 1446년(세종 28) 10월 9일이어서 1945년에 10월 9일로 확정되었다.
국경일과 공휴일의 지정
이에 따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에 의해 1949년부터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1982년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한 기념일에 포함되었다. 공휴일이 많아 경제활동에 지장이 있다는 재계의 여론에 따라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었으나 공휴일 지정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다. 2005년에는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해 국경일로 승격되었으며, 2012년 12월 28일 개정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의해 공휴일로 다시 지정되었다.
12월 25일 성탄절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독교의 기념일.
내용
기독탄신일·예수성탄대축일·크리스마스 등으로 불린다.
부활절과 더불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명절 중의 하나이다.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지 그 정확한 날짜를 아는 사람은 없지만,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12월 25일을 예수의 출생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도 아르메니아 교회는 주현절인 1월 6일을 성탄절로 삼고 있다. 12월 25일을 지키는 관습이 최초로 정착된 시기는 서방교회에서 4세기 중반, 동방교회에서는 5세기 말로 추정된다.
이 날을 출생일로 정한 이유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로마에서 동지(冬至)에 행해졌던 축제와 긴밀한 연관관계를 지녔을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본래 로마에서는 하루 해가 가장 짧았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를 기점으로 하여 농경신인 사투른(Saturn)과 태양신인 미트라(Mitra)를 숭배하는 축제가 거행되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후대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뒤 로마의 교회는 전통적인 축제일을 예수의 생일과 동일시하여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당시 미트라숭배와 사투르날리아(Saturnalia)가 매우 광범위하게 대중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풍습을 억압하는 대신 동화시키는 방법을 사용, 태양의 재탄생에 비유하여 ‘세상의 빛’인 예수의 탄생을 널리 알리고자 한 것이다.
이런 입장은 점차 널리 퍼져갔으며, 예수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Arianism)에 대한 대항논리를 정교화시키면서 강화되었다. 신학적인 정당화가 이루어졌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날을 3월 25일로 정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예수의 삶이므로 응당 완전히 꽉 찬 기간 동안 생애가 이루어졌으리라 보기 때문에 수태도 3월 25일에 행해졌다는 것이다. 이 계산에 의하면 예수의 출생은 12월 25일이다.
12세기에 이르면 이 날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제일(祭日)이 되었으며,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이 성행하여 성 니콜라스(St. Nicholas)는 선물의 상징이 되었다. 15·16세기에는 예수의 탄생을 소재로 수많은 예술작품이 등장하게 되어 광범위하게 대중화된 양상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난 뒤 청교도 및 칼뱅교도들에게 이교도의 풍습이라고 배척받았다. 또한 크롬웰 치하의 영국에서는 이 날 제의를 행하는 것이 법으로 엄금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미국의 뉴잉글랜드지방에도 이전되어 1856년 이전에는 법정공휴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끈질기게 이 날을 중심으로 선물교환 등을 하면서 전통을 이어나갔고, 19세기에 이르러 크리스마스 트리와 크리스마스 카드라는 대중적 풍습이 가미되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또한, 「고요한 밤, 거룩한 밤(Silent Night)」과 같은 크리스마스 캐럴이 이때 등장하였다.
미국 등지에서는 성 니콜라스를 대신하여 산타클로스(Santa Claus)가 선물을 보내는 사람의 상징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날은 세계적인 축제일이 되었고, 이때 사용되는 용품생산에 많은 기업이 관여하면서 커다란 상품시장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날과 연관되어 있는 사항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기원은 원시시대의 수목숭배와 연결시킬 수 있으나 가까이는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연극에 뿌리를 두고 있다. 거기에서 에덴의 동산을 상징화하면서 ‘낙원의 나무’를 사용하였으며, 연극이 탄압을 받게 된 뒤에는 집안으로 들여와 사탕·과일·촛불로 장식하게 되었다.
19세기 초 독일에서 북유럽국가들로 전파되었고, 1841년에는 빅토리아여왕의 남편인 알버트공에 의하여 영국에 소개되었다. 미국에서는 19세기 초 펜실베이니아지방에 이주한 독일계 정착민들에 의하여 전달되었으며, 곧 미국 전역에 퍼져나갔다. 불을 밝힌 크리스마스 트리를 공공장소에 놓게 된 것은 바로 미국에서부터였다.
우리나라에도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는 풍습이 전래되어 나갔다. 그러나 이탈리아·스페인 및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는 그리 흔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크리스마스의 색깔은 녹색과 붉은색이다. 겨울을 이겨낸 생명 혹은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삶은 녹색으로,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붉은색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날과 관련된 장식의 색은 이 두 가지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붉은 포인세티아의 사용이나 크리스마스 화환은 여기에 근거를 둔 것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현재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 때는 19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캐럴’이라는 말은 원래 플루트 연주에 맞추어 추는 춤곡이라는 의미로 밝고 경쾌하며 후렴과 반복이 행해지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단순하고 율동적인 노래인 캐럴은 원래 15세기에 영국에서 황금기를 맞게 되나, 종교개혁과 뒤이은 개신교의 영향으로 캐럴의 발전이 둔화되어 미약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던 중 19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베들레헴의 작은 성(O Little Town of Bethlehem)」·「오 성스러운 밤(O Holy Night)」 등이 이때 작곡되어 현재까지 계속 불리고 있다.
대중화된 노래로서는 「징글벨(Jingle Bells)」·「화이트 크리스마스(White Christmas)」 등이 있다. 영국 소설가 디킨스 (Dickens,C.)가 쓴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ol)」(1843)이라는 작품은 크리스마스 및 이때 불리는 캐럴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카드가 지금의 모습대로 등장한 것은 1843년 영국의 삽화가인 호슬리(Horsley,J.C.)에 의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한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 “당신에게 즐거운 크리스마스와 행복한 새해를(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to You).”이라는 문구를 적어 런던에서 1,000장을 팔았다. 1860년에는 온 영국에 펴졌으며, 곧 미국으로 건너가 일반화되었다.
1907년 미국에서는 결핵을 치료하기 위한 크리스마스 실이 고안되어 카드에 붙여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하여 카드보내는 것이 보급되었다. 실도 1933년 미국 감리회 의료 선교사인 홀(Hall,S.)에 의하여 처음 발행되었다. 또한, 이 날을 중심으로 성대한 연회가 벌어져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것이 행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영국에서는 거위나 수탉 등을 재료로 하였으나, 16세기 말부터는 멕시코 등지에서 들여오는 칠면조를 사용하게 되어 지금까지도 주요 요리로 인정받고 있다. 뚱뚱하고 온화하며 흰 수염의 산타클로스에 대한 이미지는 4세기 소아시아의 성자인 성니콜라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많은 선행을 하고 선물 주는 것으로 유명한 이 성자의 이미지는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전래되었고, 다시 초기 네덜란드 이주민들에 의하여 미국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산타할아버지 모양이 만들어진 것은 1863년 나스트(Nast,T.)라는 만화가에 의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 날을 위하여 마굿간이 만들어져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와 요셉, 양과 짐승들, 아기예수 앞에서 경배드리는 동방박사들의 모습이 만들어진다.
이는 13세기에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of Assisi)[성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에 의하여 처음 시작되었다는 풍습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명동성당이나 대전 목원대학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날을 법정공휴일로 지정, 기념하고 있다.
'[ 남성,여성 패션 핫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잠꼬대 치료법 우선 수면다원검사로 원인 파악해야 (0) | 2020.08.12 |
---|---|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 피해 (0) | 2020.08.07 |
독서에 관한 명언 100선 (0) | 2020.08.06 |
스마트폰 시장 변화 (0) | 2020.08.06 |
스마트폰 중독 해결방법 (0) | 2020.08.06 |
댓글